움직이는 네거티브의 이미지, 오연진의 《레이스》
2020
윤원화

네거티브의 이미지가 주인공인 전시를 상상할 수 있을까? 엄밀히 네거티브는 보이기 위한 이미지가 아니라 그런 이미지를 복제하기 위한 인쇄용 판면이다. 그것은 원본 이미지를 반전시킨 (‘네거티브’) 상으로, 이미지를 이루는 특정한 색의 선과 면 또는 미세한 점의 그라데이션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을 인쇄 과정에서 차단하는 마스크 역할을 한다. 사진 이전에도 그림을 판화로 찍어내거나 책의 지면을 인쇄할 때 네거티브 판을 만들어 썼다. 전통적으로 그것은 인쇄 기술자의 영역으로, 완성된 이미지를 관람하는 사람들이 굳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단계에 속했다. 일종의 광화학적 인쇄술로서 사진 기술이 발명되면서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필름을 현상하는 네거티브 기반의 이미지 제작 프로세스가 처음으로 대중화됐지만, 디지털 사진이 일반화되면서 네거티브는 사진적 실천과 분리되어 다시 인쇄술의 전문 개념으로 되돌아왔다. 

사본을 제작하기 위한 사본으로서 네거티브는 일반적으로 그것이 봉사하는 원본 이미지를 보여주기에 적합하지 않다. 네거티브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지가 물질적으로 실현되는 제작의 공정이다. 다양한 소재의 판화 원판과 인쇄용 판, 필름과 필름 이전의 각종 사진 네거티브, 사진 이후 네거티브 기법이 활용되는 다양한 사례들, 그와 연관된 이미지들을 전시의 형태로 모아볼 수 있다면 무척 흥미진진할 것이다. 그것은 사진의 역사를 포함하여 넓은 의미에서 이미지 복제 기술의 역사를 망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복제’라는 말은 주의해서 써야 한다. 그것은 이미지를 찍어내는 물질적 프로세스를 이미 생성된 이미지를 동일하게 반복해야 한다는 이념적 목적으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은 ‘복제 기술’의 역사를 재미있지만 오류가 많은 원시적인 기술들에서 출발하여,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원본과 차이 없는 사본을 양산하는 복잡한 첨단 기술로 귀결되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정돈해 버린다. 

반면 사진은 이미지를 찍어내는 것 또는 물리적 각인에 의한 복제를 생성 이후의 이차적 가공이 아니라 이미지 생성에 수반되는 일차적 과정으로, 더 나아가 생성의 핵심 원리로 도입한다. 한 순간의 번쩍임으로 환원되지 않는, 찍어내는 과정의 연쇄에서 무엇인가 생겨난다. 하나하나의 네거티브는 이미지가 각인된 일종의 도장으로서 그 이미지가 어떻게 거기 찍혔으며 그것으로 어떤 이미지를 더 찍어낼 수 있는가 하는 역사성과 잠재성을 내포한다. 그것들은 동일자가 당연히 변하지 않는 세계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기적인 세계, 그럼에도 인간이 끊임없이 그런 기적을 추구하며 세계를 변화시켜온 역사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이미지를 굴리고 찍으면서 시간의 불연속면을 쌓아간다는 점에서, 네거티브의 운동은 영화와 전혀 다른 구조로 쌓아 올려지는 무빙 이미지의 계열을 전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을 전시의 형태로 모색하는 일은 복제 기술의 역사를 개괄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가 된다. 


오염된 실크 스크린 

네거티브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 그 움직임이 어떻게 시각화되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는 오연진의 〈레이스〉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이 전시에는 네거티브를 지배하는 원본 이미지 같은 것은 없다. 겹쳐지고 찍히면서 변형되는 이미지의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전시장 왼편을 보면 네거티브 판과 그것을 인화한 판이 나란히 배치되어 기본적인 작업 방법을 도해하고 있는데, 마치 실크 스크린 공정이 회화적 붓질과 사진적 프로세스로 오염되어 뒤죽박죽이 된 것 같다. 반투명한 천에 이미지를 인쇄하여 회화용 프레임에 씌우고 그 위에 다시 아크릴 물감을 발라서 네거티브 판을 만들고, 그것을 뒤집어서 감광액을 바른 종이에 대고 안료 대신 빛을 통과시켜 일종의 광학적 판화를 찍어낸다. 그 결과는 판화와 회화와 사진의 스테레오타입 중 어느 것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제작 방식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눈에 보이는 이미지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전시된 작업들은 ‘회화’처럼 자기 완결적 공간 또는 대상을 묵상하는 고요한 시간을 제공하지도 않고, ‘사진’처럼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무언가와 직면하는 찰나의 순간을 재생하지도 않는다. 이미지의 평면들은 두께 있는 몸체를 입고 무지개 색으로 빛을 산란시키는 기름막처럼 시선을 어지럽힌다. 이들은 자기가 단일한 이미지가 아님을 계속 상기시키면서, 다수의 이미지들이 적층되고 밀착되며 서로를 찍어내고 또 찍히기를 반복하는 불투명한 운동의 시공간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이 운동이 원본과 사본의 구별을 무시하고 매체들 간의 경계를 짓밟으면서 모든 것이 무차별적으로 녹아내리는 수렁으로 돌진하는 것은 아니다. 오연진은 이미지들을 가상적이고 두께 없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점유하는 얇은 몸체로 가동해 보면서 그것들의 고유한 리듬과 구조, 주제와 모티프를 찾으려 노력하는데, 특히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막과 판 사이의 진동이다. 

평면의 두 가지 양태로서 막과 판은 오로지 물질적 조성과 물리적 구성의 차이로 구별된다. 판이 딱딱하게 고정된 납작한 입체로 존재한다면, 막은 그보다 더 얇고 유연해서 판과 다른 방식으로 시공간을 점유한다. 막은 하늘하늘하게 움직이며 빛을 수용하는 동시에 차단할 수 있다. 막은 쉽게 말리고 구겨지고 접히며, 서로 겹쳐져서 또 다른 막을 산출할 수도 있고 단단한 지지체가 더해지면 판으로 변형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판은 다시 막으로 전사될 수 있다. 막이 운동 속에 있다면, 판은 그 운동이 잠정적으로 끝나고 새롭게 재개될 수 있는 종점이자 출발점, 또는 일종의 회전문이나 룰렛처럼 멈춰 있다. 전시는 “레이스(Lace)”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판의 견고함보다 막의 운동성에 초점을 맞추지만, 실제로 전시장에 들어와 있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지 않게 물리적, 화학적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막보다는 얇은 판에 가깝다. 이 판들이 막의 실물과 잔상들을 겹치고 나열하면서 막의 반투명한 관념들 또는 흐릿한 기억들을 전시장으로 불러들인다. 


막과 창문 

작가는 자신이 참조한 막의 역사적 선례들을 전시의 실마리처럼 여기저기 흘려 놓았다. 먼저 전시된 연작의 제목을 빌려온 마이클 스노우(Michael Snow)의 〈태양의 숨(Solar Breath)〉(2002)에 등장하는 하얀색 커튼이 있다. 그것은 오두막 창문으로 바람이 드나들 때마다 마치 숨쉬는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꺼지기를 반복하며 공간의 빛과 소리를 리드미컬하게 조율한다. 여기서 커튼은 동시에 여러 가지로 존재하며 끊임없이 모습을 바꾼다. 평면과 입체, 공간과 시간을 가로지르면서, 그것은 빛을 조절하는 시각적 장치인 동시에 공기와 상호작용하는 일종의 악기가 되지만 그 작동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면 우연적인 것이다. 창문과 커튼으로 이루어진 이중 구조와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운동의 다양한 양상들은 전시작들을 구성하는 데 하나의 가이드로 작용한 듯하다. 그것은 이미지가 물리적 몸체를 경유하여, 그렇지만 접촉에 의한 전사로 국한되지 않는 좀 더 개방적인 방식으로 움직여 나갈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기계적 각인이 아닌 변덕스러운 숨결의 형태로 배어든다. 이미지들이 움직이면서 리듬은 있으나 법칙은 없는 유체적 공간을 형성한다. 이렇게 일렁이는 공간을 통해 이미지들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본다면, 이를테면 광화학적 변성이 이미지의 변질이 아니라 생성을 약속하는 것으로 처음 인식되었던 시간을 여러 겹의 막으로 떠내어 창문처럼 벽에 고정해 놓으면 무엇이 보일까. 전시는 네거티브 기반의 사진술을 처음 고안한 윌리엄 폭스 탤벗(William Fox Talbot)의 『자연의 연필(The Pencil of Nature)』(1844)에서 한 구절을 머리말처럼 짧게 인용하는데, 이 대목을 실제로 책에서 찾아보면 마치 전시작들을 구성하는 재료의 목록처럼 읽힌다. “건물, 조각상, 초상화 등은 음영이 반전되어 네거티브 이미지로 알아보기 어렵고 포지티브 이미지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나 레이스나 나뭇잎 같은 것을 본뜰 때는 네거티브 이미지로도 충분하니, 검정색 레이스는 흰색 레이스만큼 자연스럽게 보이고 대상의 패턴을 정확히 전달한다.” 

일단 초기 사진의 역사를 의식하고 전시를 다시 보면, 사진이란 무엇인가가 아직 미확정 상태였을 때의 사진 이미지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작가의 머릿속에 누적되었다가 작업의 형태로 재조합 되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단단한 금속성의 다게레오타입과 부드러운 섬유질의 칼로타입, 그것을 통해 기록된 19세기 중반 유럽의 꿈세계가 아무 기억도 향수도 없이 냉정하게 재생된다. 그때와 지금을 가로지르는 것은 레이스 또는 천의 물리적 이미지, 막 위에 놓인 막의 잔상이다. 탤벗은 고고학, 식물학, 예술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교양인이었고, 그런 시대적 특성은 그가 택한 사진의 소재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하지만 그는 장식 패턴의 레이스나 심지어 무늬 없는 천조각도 많이 찍었다. 아마도 사진 기술을 시험하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 패턴이었겠지만, 귀퉁이가 접히고 올이 풀린 천의 잔상이 사진으로 남은 것을 보고 있으면 그가 이 불규칙한 형태들의 정밀한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을 그저 좋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천의 오톨도톨한 면을 빛으로 훑는 그 원격의 감촉을 길잡이 삼아 이미지들이 거쳐온 길과 거쳐갈 수 있는 길들이 뒤섞인 미지의 시공간을 항해하고 지도 그린다.

이미지의 시공간을 향한 일종의 창문으로서 이 작업들이 무엇을 보여주는가는 단언하기 어렵다. 식별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식별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너스의 얼굴이 있다. 수천 년 전에 제작되고 수백 년 전에 발견된 밀로의 비너스가 다른 비너스들과 뒤섞이고 다른 그리스 로마 조각상들과 연합되어, 수많은 석고상과 사진, 연필 데생과 3D 모델링 이미지로 복제된 끝에 여기 도착했다. 고전적 아름다움의 표본이자 미술과 미대 입시의 상징이며 베이퍼웨이브의 필수 요소로서 그 이미지들이 언제에 속하고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확정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여러 시간과 공간에 흩어져 있다. 그 중 몇몇은 탤벗의 소유였다. 그는 고전 조각상의 미니어처 석고 복제상을 수집했고 종종 그 물건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말하자면 그것이 그의 핀터레스트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복제는 아름다움을 연구하고 퍼뜨리는 수단이었지 그것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조그만 비너스 복제상을 다양한 각도와 화학적 배합으로 반복해서 촬영하는 동안 이미 비너스의 의미는 조금씩 산란되고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그 시간을 응시하고 다르게 재가동할 수 있는 여지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