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과 창문 ‘너머’ – 오연진의 《레이스》와 백종관의 〈추방자들〉
2020
함연선

2019년 12월 26일 홍대입구역 근처의 전시장 두 곳에 들렀다. 오연진의 개인전이 진행 중이었던 ‘전시공간’과 당일이 백종관의 개인전 마지막 날이었던 ‘온수공간’이 그곳이었다. 작은 골목길들을 제하고서 멀리서 보면, 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공간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주 우연하게도 두 공간에서 전시되는 작업 역시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형세였다. 

한쪽에서는 오연진이 영상 매체를 레퍼런스 삼아 회화와 사진을 다루었고, 반대편에선 백종관이 회화로부터 출발한 문제의식[“다시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가, 파리가 화판 전체의 인위성을 가리키는 이중적인 재현 체계의 공존을 암시함과 동시에 재현의 공간과 관객의 공간을 분리했음을 떠올린다.”]을 영화로 끌고 가고 있었다. 그리고 둘 모두 화면이라는 개념적 지지체 자체에 대해서 천착하고 있었다.

화면을 바라보는 가장 흔한 방법은 그것을 ‘창’으로 보거나 혹은 ‘틀’로 보는 것이다. ‘창’으로서의 화면이 2D를 3D로 보이게끔 하는 환영적 공간을 완벽하게 구축하고 그 자신을 비가시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틀’로서의 화면은 지지체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며 화면 내부에 특유한 질서를 지향한다. 전자가 전통적 회화의 화면이라면, 후자가 현대적 회화의 화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화면은 ‘창’으로 여겨진다. 실제를 기록하는 비인간적 카메라의 존재 때문이다. ‘창’으로서의 화면의 성격이 강한 영화라는 매체의 등장과 함께 회화는 ‘화면(畵面)’의 ‘면(面)’이라는 기본단위에 천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오연진과 백종관의 작업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비슷한 위치에서 창으로서의 화면을 건드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오연진의 개인전 《Lace》에서 특기할만한 것 중 하나는, 전시 중인 작품들의 제목 모두 “Solar breath”라는 어구 뒤에 “00:00” 형식의 러닝타임을 덧붙인 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었다. 〈Solar breath〉는 마이클 스노우의 약 60여 분짜리 영상 설치 작업이며, 유튜브 에서 5분짜리 축약 버전을 볼 수 있다. 《Lace》의 작품 제목들 뒷부분의 러닝타임은 모두 “05:00”에 미치지 못하는데, 이 사실은 오연진이 보고 레퍼런스 삼았을 〈Solar breath〉가 5분짜리 유튜브 축약본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추론을 가능케 한다. 

잠시 〈Solar breath〉에 대해 짧게 묘사하자면, 고정된 카메라로 하얀 커튼이 달린 두 쪽의 창문을 롱테이크로 촬영한 영상이라 할 수 있다. 열린 창문 틈으로 바람이 불어 들면서 커튼이 창 안쪽(창이 달린 공간 안쪽)으로 날리다가, 바람이 불어나가면 커튼이 창문틀의 방충망에 딱 들러붙는다. 이러한 커튼의 움직임으로 ‘볼 수’ 있는 바람에 대해 마이클 스노우는 “태양의 숨결”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영상 속에서 관객은 화면의 깊이가 갖춘 스펙트럼을 넓게 오가는 바람을 바라봄으로써 화면 내부의 공간감을 지각한다.

《Lace》의 작품들에는 조각상이나 교회와 같은 형상들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작품들은 크게 세 개의 군으로 나뉠 수 있다: (1) 캔버스 틀에 이미지가 프린트된 천을 씌우고 그 위에 다시 아크릴 페인트를 칠한 작업, (2) 인화지 위에 크로모제닉 프린트(chromogenic print)된 사진을 나무판이나 액자에 표구한 작업, (3) 커다란 인화지에 크로모제닉 프린트된 사진을 인화지 채로 압정을 사용하여 벽에 고정한 작업. 그리고 이렇게 나뉜 군별로 화면상의 이미지 구성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몇 개의 예외를 제외하면 (1)번 군의 작업과 (2)번 군의 작업 이미지에 포함된 주요 형상은 서로 대칭 한다. 〈Solar breath 01:31〉과 그 바로 옆에 걸려 있는 〈Solar breath 03:34〉 속 조각상의 형상이 서로 선대칭하고, 〈Solar breath 03:56〉과 〈Solar breath 04:19〉 속 교회의 형상이 서로 선대칭하는 것이다. 형상의 대칭 뿐 아니라 색 또한 서로 반전되어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이미지 구성상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사진 작업인 후자에는 화면 가장 위에 십자 모양의 창 혹은 캔버스 틀 형상이 있고 그 너머로 앞서 말한 조각상이나 교회와 같은 형상이 보이는 반면, 회화작업인 전자에서는 캔버스 틀의 형상이 그림자와 같은 희미한 어둠의 모습을 한 채 얇은 캔버스 천을 통과하여 비친다. 한편 (3)번 군의 작업에는 앞의 두 군의 작업에 등장했던 조각상이나 교회의 이미지가 레이스 천 위에 오른 채 구겨진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오연진은 전통적인 인화의 방식을 통해서나 프린트된 캔버스 천 위에 다시 아크릴 페인팅을 함으로써 복수의 면들을 한 화면 위에 ‘압축’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압축된 면들 사이에 공간감과 비슷한 것이 생성된다는 점이다. 이 유사-공간감은 환영적 공간의 구축이라는 일반적 맥락과는 동떨어져 있는데, 그것이 카메라가 ‘포착’하는 실제와도, 회화가 구축하는 재현의 공간과도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외려 이 유사-공간감은 오연진의 작업이 갖는 두 가지 차원의 ‘대칭’의 결과이다. 하나는 시간을 담아내는 방법에 있어서 영상 매체(〈Solar breath〉)와의 대칭, 다른 하나는 물리적 지지체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의 (1)번 군의 작업과 (2)번 군의 작업 간의 대칭이다.

첫 번째 대칭은 간단하다. 영상이 카메라가 대상을 포착하는 ‘시간’ 자체를 너무도 당연하게 담아낸다면(특히나 〈Solar breath〉와 같은 작업은 더욱 그럴 것이다), 오연진의 사진 작업들((2)번 군과 (3)번 군의 작업들)은 인화 과정에 있어서의 노출 시간을 통해 시간을 담아내고자 한다. (3)번 군의 작업에서 보이는 구겨진 얇은 천(과 함께 ‘구겨진’ 교회와 조각상 이미지들)은 더욱 확연히 그러한 시간성을 담지하고 있으며 이미지를 출력한 천 위에 아크릴 페인트를 올린 (1)번 군의 작업에서도 작업 과정 덕택에서 시간성이 담보된다. 더불어 전시장에 보이지 않는 ‘원본’(조각상이나 교회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을)이 각기 다른 세 가지 방법—이 방법을 통해 각기 다른 세 개의 작업 군이 ‘출력’된다—으로 반복되는 것 또한 오연진이 시간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법이다. 그렇기에 관객은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서 캡션과 서문이 적힌 종이를 손에 쥔 뒤 벽을 따라 시계방향을 둥그렇게 걸어가며 반복과 대조의 방법을 경유한 ‘출력’이 갖는 시간성을 염두에 두게 된다.

두 번째 대칭에선 이미지가 올라간 지지체와 프레임 간의 관계가 중요해진다. (1)번 군의 작업에서 얇디얇은 지지체 위에 이미지가 올랐기에 뒤에 위치한 캔버스 틀이 비치게 되고, 따라서 프레임이 이미지 뒤에 있으면서도 신기루처럼 어렴풋이 보이게 된다. 그러나 (2)번 군의 작업에선 프레임이 화면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데, 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십자 모양의 형상은 캔버스의 틀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창문의 틀 또한 연상시킨다. (어렸을 적 그렸던 ‘집’ 그림의 창문은 언제나 십자 모양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따라서 교회나 조각상, 책등의 이미지는 인화의 과정을 생각했을 때는 캔버스 틀 아래에 깔려 있는 것인 동시에, 또한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이다. 이 요상한 ‘너머’의 감각이 오연진이 새로이 주조한 ‘창’의 감각이다.

반대로 백종관은 본인의 개인전 《파리대왕독본》의 메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영상 작업 〈추방자들〉에서 공간감으로부터 시작해 그 공간들을 분할하는 면들의 파편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오연진을 마주보고 있다 할 수 있다. 

해당 전시의 영어 제목 “Fly on the Eye”가 암시하듯이, 〈추방자들〉은 러닝타임 내내 창문 유리창 안쪽(즉 창문이 설치된 공간 내부)에 앉아 있는 파리의 시점과 동기화된 카메라 뷰를 보여준다. 스노우의 〈Solar breath〉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고정된 채 창 밖 공원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카메라는, 창이라는 면과 그 너머의 풍경과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어 일견 화면의 공간감을 의도하는 플랑 세캉스인 것 같다. 하지만 처음부터 관객이 바라보는 시점이 창 ‘안쪽’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란 걸 주지시키기 위해 창 바깥의 사운드는 차단되고 오직 창 안쪽 공간의 소음들—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물건을 책상 위에 놓는 소리 등—만이 끊임없이 들린다. 창 너머 멀리, 희미하게 얼굴도 확연히 분간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보이는 것은 그들의 몸짓이다(그들의 몸짓은 분명 과장 되어 있다). 총 30분짜리의 이 영상 작업은 그렇게 고정된 카메라에 포착되는 작지만 명백한 움직임들을 담아낸다. 혹은 카메라 가 멈추어 서 있기에 관객은 그러한 움직임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에 부가되는 ‘움직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시간의 경과다. 이 작업에서 시간은 특별한 임무를 수행한다. 바로 공간감을 이루는 면들을 분해하는 것.

관객은 어느새 창 밖이 어두워지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창 안쪽(즉 보이지 않는 카메라 뒤편)의 빛들이 하나둘 켜지면서 창에 비치는 것을 본다. 창 밖은 어둡고 (보이지 않는) 창 안은 밝으며, 그 빛들이 창 표면에 비친다. ‘창으로서의 영화’에 특유한 공간감의 자리에, 면과 면들 간의 관계가 대신 들어앉은 것이다. 말하자면 공원의 풍경이 속한 면이 있고, 카메라가 혹은 파리가 앉아 있는 면이 있고, 다시 관객 혹은 파리 혹은 카메라의 뒤통수에 위치하여 오직 창에 반사되고 들리는 것으로써만 지각되는 (보이지 않는) 면이 있는 것이다.

창 안쪽과 창, 그리고 그 너머의 관계를 면과 면과 면의 관계로 드러내는 백종관의 전략 속에서 재현 혹은 관찰/기록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 또한 엿보인다. 〈추방자들〉의 가장 극적이며 동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아직 해가 밝게 떠 있을 무렵 공원에서 놀던 한 무리의 사람 중 한 명이 화면 가까이 걸어 나와 카메라를 향해 손짓을 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갑자기 그들을 엿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란다. 그들이 그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면(面)에 기거하고 있는 일종의 주체라는 사실이, 멍하니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던/혹은 창에 앉은 파리의 시점에 완전히 스스로를 동기화 했던 관객의 지각에 순간적으로 틈입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손짓을 하던 사람은 가까워진 카메라와 자신의 거리를 포기한 채 금세 친구들 무리로 돌아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이다. 결국 관객의 시야를 다시금 ‘막는’ 것은 이후에 도래할 바깥의 어둠이다. 창 밖이 밝을 때 창은 가시화되지 않고(우리 창에 묻은 때는 차치하도록 하자) 마찬가지로 창 안도 가시화되지 않는다. 대신 들린다. 그리고 창 밖만이 보인다. 그러나 이 어두워지면 창 너머에 있던 것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대신 어둠을 따라 하나둘 켜지는 창 안의 빛들이 창에 비치면서 창 안과 창이 가시화된다. 이때 창 표면에 비치는 빛들 또한 창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희천의 말마따나 ‘시뮬레이션의 세계’에서 뒤돌아볼 수 있는 자는 없기에 우리는 때론 어두워지는 시간에 켜둔 빛들이 비치는 우리 ‘앞’의 표면을 보면서 나 스스로가 속한 세계를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종관이 창으로서의 화면에 있어서는 역설적이게도 창의 표면을 부각시킨 것은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한계에 대해 지적하기 위함이면서 동시에 의 대상만큼이나 ‘너머’에 있는 것에 다름 아닌 주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