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의 필요충분조건
2022
김현정

오연진이 사유하는 작업의 과정은 그가 종종 언급하는 마야 데렌을 떠올리게 한다. 마야 데렌은 전방위로 활동했던 아방가르드 예술가였지만 그에게 있어서 영화란 세상과 고립된 예술 혹은 유희가 아니었다. 외려 데렌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영화 작업을 또 다른 하나의 리얼리티로 탄생시켰다. 그래서 데렌의 영화는 현실에서보다 더욱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이미지의 산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오연진의 작업과정에 있어서도 데렌이 하나의 또다른 ‘인위적 리얼리티’를 창조하듯 사진 매체를 통한 실험과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로 그만의 인위적 리얼리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오연진의 사진 작업은 추상회화처럼 보이거나 또는 캔버스를 수십 개의 동일한 크기로 맞추어 제작한 대형회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람객이 전시공간에 들어서면서 오연진의 작업이 설치된 벽면까지 걸어 가다 보면 눈앞에 마주한 매체는 회화가 아닌 분명한 사진이지만 말이다. 그는 거대한 이미지들이 소용돌이치는 사진으로 어떠한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일까. 오연진의 작업과 실험, 시스템과 구조를 새롭게 변주해보는 사유를 통해 마야 데렌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오연진은 사진의 기술력과 그가 실험하는 이미지의 우연성 내지는 충동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움직임을 늘 염두에 두며 작업하는 작가인 듯 하다. 나는 그의 작업에서 이렇게 특별한 균형감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미지의 ‘발견’은 마치 디지털 공간에서 우리가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무한대로 확장하여 유영하는 것처럼,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기억과 관심사를 다시 디지털 매체를 통해 간접 소환하는 과정의 흐름에 함께 존재하는 것 같다. 이미지를 창출해내는 무한대의 기약 없는 시간과 공간의 작업을 시작하는 순간에서 원하는 그 '무엇’이 변주되어 눈앞에 가시화 되는 순간까지, 오연진은 그렇게 현실의 공간에서도 지속적인 실험을 지체하지 않는다.

오연진이 작품을 통해 현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들은 사진의 속성과 디지털 이미지 혹은 영화의 합성 이미지처럼 각각의 매체에서 다루어지는 기술적인 요소들이 중첩되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것은 오연진이 우연을 의도하여 탄생시킨 ‘인위적 리얼리티’처럼 실험성이 돋보인다. 이번 개인전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들의 제목이 그러하듯, 우리가 보편적으로 상상하는 자연과 우주, 생태와 대기의 현상들을 오연진은 사뭇 대조적으로 시점을 전환하여 역설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작품명을 확정한 흥미로운 시도가 돋보인다. 이러한 시도 또한 다분히 오연진이 향후 지속적으로 추구할 작업의 과정이자 즐거운 사유가 될 것이다. 

방금 위에서 언급한 오연진 개인전의 출품작 제목들을 살펴보자. ‹그물유영›, ‹상승하는 낙화›는 우리가 살아오면서 특별한 의구심을 품지 않고 수용하는 자연현상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연진은 이미지를 인화하고 위와 같은 작품 제목을 명명했다. 그물은 홀로 떠다닐 수 없는 오브제이고 떨어지는 꽃도 아래로 수직 낙하를 할지언정 상승한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에서 기대할 수 없는 풍경에 가깝다. ‹대기의 색›에서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색깔이 아닌, 초록, 파랑, 검정, 오렌지 빛처럼 보이는 다양한 색감의 어우러짐을 두드러지게 본다. ‹셀 수 없는 봄›에서도 홀로그램처럼 보이는 연속적인 이 미지들이 우리의 시선을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며, ‘계절을 셀 수 없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오연진의 사진 이미지는 실제로 만나면 작품 제목처럼 아련하다거나 낭만적이라거나 하는 느낌 보다는 하나의 덩어리이자 이미지로 크게 다가온다. 아울러 드는 생각은, 마야 데렌이 그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기법처럼 오연진이 길어 올린 이미지들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은 어떤 변주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그가 보여주는 사진과 이미지들은 늘 유영하면서 힘있는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사이’, 그 절대값은 희미하거나 알 수 없지만, 오연진이 작업을 위해 설정해놓은 최소한의 조건으로 그녀는 또 다른 세계와 차원의 ‘사이’에 주목하며 변화와 역동성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다시 움직이고자 작업하는 작가이다.

오연진은 그의 작업실에 있는 분리된 공간, 암실에서 카메라 필름이 가진 속성을 연구하며 필름의 역할-유동성-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작가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화가 가능한 필름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사진이 지니고 있는 개성 사이에서 필름이 할 수 있는 연결 통로로서의 가능성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네거티브 필름과 오연진이 만들어내는 컬러 이미지의 사진 사이를 유연하게 연결하는 '인터페이스’가 디지털 공간의 유튜브처럼 과연 존재할 수 있을지, 그는 고민한다. 오연진의 작업 과정은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동시대 미술에서 뉴미디어라고 명명하는 매체가 나타내는 특성을 많이 닮아있다.

사진을 주요 매체로 작업하는 작가가 사진이 가진 양가적인 특성에 매료되어 치열하게 간극을 build-up(구축) 하고 있지만 동시에 오연진은 우리의 일상에 이미 자웅동체(雌雄同體)가 되어버린 디지털 기기가 생산해내는 이미지 뒤의 숨은 이야기, 시간과 공간의 흐름, 자연과 우주의 구조와 유연한 흐름에도 주목한다. 다시 마야 데렌으로 돌아가 보자면 그가 ‘발견’과 ‘발명’ 으로 정의되는 촬영과 편집 기술을 시와 춤과 건축과 음악에 병합시켜 그녀의 영화 속에 ‘인위적 리얼리티’ 를 만든 것처럼, 오연진의 사진 매체의 본질에 대한 고민과 실험, 이미지—작가의 사유를 압축해서 상상의 여지를 크게 ‘간극’으로 만든—우리의 오프라인 시공간과 차별화될 수 있는 지점이야말로 그의 작업이 가지는 미학적 특징이 아닐까. 그의 또 다른 신작 ‹페스타›, ‹세계›, ‹지도›, ‹다목적 초원›에서도 우리는 오연진의 이미지에 대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제목으로 유추하자면 이 세 가지 제목을 가진 작품을 통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가, 무엇을’ 이라고 하는 해당사항을 모두 질문해야만 할 것 같다. 오연진이 상상하고 의도했던 시간과 공간은 이 작품에서 어떻게 흐르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바다, 바위, 나무, 숲, 초원 등으로 상상 가능한 자연, 그리고 그곳에서는 어떠한 관계가 형성되고 무슨 대화가 있는 공간일까? 이러한 시공간에서 우리는 어떤 심리적 상태를 경험하게 될 것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사진에서 당연시되었던 피사체가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은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다분히 연속성이 결여 되어 보이는 이미지들은 마치 영상의 개념으로 보자면 분절된 장면들처럼 보인다. 하나의 단위로 이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오연진의 개별 작품의 이미지들도 압축과 확장의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하나가 되기’는 어려운 독립성을 고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럽에서 뤼미에르 형제의 활동사진이 발명되기 이전, 19세기 ‘프리-시네마(Pre-Cinema) 시대에 이미 움직이는 그림을 보여주는 매우 다양한 애니메이션 장치들이 발명되어 사람 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 사람들은 ‘철학적 장난감(Philosophical Toys)’이라 고 불렀다고 한다. 이 기계장치는 빛과 사물의 운동 원리 및 시각 잔상효과, 그리고 가현 운동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이미지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광학 장난감(Optical Toy)’ 이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도 페나키스티코프는 벨기에 물리학자 조셉 플라토와 오스트리아 수학자이자 발명가인 스탬퍼에 의해 1832년 발명된 원판형 시각 놀이 애니메이션 장치로서, 움직이는 그림이 그려진 원판을 회전시키고, 그림 사이의 ‘틈’을 통해 반대편의 거울에 비쳐서 나타나는 움직임을 보는 장치이다. 오연진의 작업과정에 있어서의 실험, 유기적 구조를 조망하면서 분절과 전체를 아우르는 직조방식을 통해 ‘진실로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를 생각한다. 오연진의 작업을 논하며 사진에서부터 뉴미디어, 심지어 애니메이션의 탄생까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그의 평면작업을 단순히 ‘평면’이라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개인전 제목이 《Tweed》(트위드, 혼성직물)인 것처럼, 오연진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이미지는 가로세로가 직조되어 평면이 나오지만 그것이 또한 복합적인 구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다른 공정을 반복해야 하는 트위드 직물처럼, 은밀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특유의 ‘움직이는’ 조형언어를 전하고 있다.